📷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일본
이예슬(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5월, 한국에서 이틀간 만났던 일본인 학생들을 만나러 6월 19일부터 22일까지 일본으로 떠났다. 그저 일본 학생들과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는 한국에서의 가벼운 마음가짐과는 달리, 이번 한일 유스포럼 참가는 조금 더 진지한 생각으로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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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법안 국회통과 반대를 외치는 국회 앞 농성
처음 가는 일본이라 두근두근.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 한국에선 접하지 못하였던 습한 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곳은 일본 국회의원 회관. 도착하자마자 비가 온다며 툴툴대는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장대같은 비를 맞으며 전쟁 반대하는 농성을 하고 계신 어르신들. 아베 정권하에 점점 더 우경화 되어가는 일본의 현실에 맞서고자 정치적 성향, 지향하는 목표가 다름에도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으기 위해 한곳에 집결해 있다는 사실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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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평일에도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야스쿠니 신사
숙소에 짐을 보관하고 향한 다음 장소는 야스쿠니 신사. 뉴스에서만 보던 그 곳에 내가 왔다니. 청동으로 만들어진 도리에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언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 도심에 교통도 편리하고 심지어 근처에 학교도 있는 그런 일상생활 속에 야스쿠니 신사가 있었다. 접근성이 좋은 곳. 언제든지 누구나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에 전범들과 우리 선대들이 합사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신사를 보고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야스쿠니 안에 있는 박물관. 동행한 일본분께서 300엔으로 입장료 결제하라고 해서 처음엔 양심이 찔렸지만 이곳에 하루에 1000명의 관람객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300엔도 아까웠다. 엄청난 크기의 박물관, 일본이 다른 나라를 공격한 것이 당연하다라는 내용의 자료들이 주를 이뤘던 그곳에서 무엇보다 야스쿠니에 합사되어있는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다다다닥 나열되어있는 전시관에 들어섰을 때의 그 압도감은 엄청났다. 자신의 굳은 심지가 없고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언론이 말 하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다면 위축될 수 있겠구나, 선동 당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튿날, 한일관계재구축캠페인 2015 유스포럼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초반에는 우츠미 아이코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NHK에서 10여년전에 제작되었던 다큐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연주제는 왜 한국과 일본이 지금과 같은 긴박한 상황이 되었는가. 지속적인 역사교육이 있었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러한 교육이 없었다고 한다.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에서부터 이 상황은 시작된 것이 아닐까라는 우츠미 선생님의 강연은 주로 일본이 어떻게 아시아를 약탈하고 공격하고 아프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NHK의 다큐는 조문상 이라는 B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조선인 군속의 이야기였다. 왜 조선인이 일본인의 신분으로 죽어가야 했는가, 그럼 왜 일본은 이러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가. 우츠미 선생님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반드시 일본이 사과를 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하시면서 강연을 마치셨다. 일본에도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한국인들도 꼭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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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악화의 원인에 대해 토론 중인 유스포럼 참가자들
그 다음은 토론의 시간.
우츠미 선생님의 강연주제처럼, 한일관계가 나빠진 이유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 많은 문제점들이 거론되었지만 크게 4가지 주제로 4그룹간 토론 시작. 위안부문제, 역사교육 및 교과서 왜곡문제, 독도문제, 그리고 정부와 경제 문제. 나는 정부/경제문제 그룹에서 일본인 6명과 한국인 3명(나 포함)과 토론에 참가하였다. 우리 그룹은 학생도 있었지만, 나와 같은 시민단체 활동가도 있었으며 기자, 재일조선인, 한일관계 관련 석사 대학원생, 회사원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한일간의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러한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필요하다. 생각을 넓히고 포용하고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며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1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1시간 동안 계속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무겁지만 진솔한 대화였다.
토론을 끝으로 유스들 만의 시간은 끝이 났다. 한일관계재설정을 위한 시위를 진행하기 위해 1층에 유스들과 많은 활동가들이 집결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한국경찰에 비해 친절하다는 생각을 싹 갈아엎게 만들어준 시간. 시위를 하던 우리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일본인을 보며 감동받았다. 작은 목소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모인다면 언젠가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유스포럼의 공식적인 마지막 일정이 잡힌 21일 오전,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에 방문하였다. 전시관은 작지만 알찼다. WAM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우리가 만난 장면은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이었다. WAM은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위안부 관련 피해사실을 기록해 둔 곳이었다. 특히, 당시 군인이었던 일본인 군사의 증언이 실린 판넬이 눈에 띄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는 사무국장님의 말에 한국인 유학생분에게 부탁하여 한 장의 판넬을 정독하였는데, 처음에는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일본을 위해 죽겠다는 신념을 최고로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위안소에서 일본인 여성을 만났고, 왜 일본인 여자가 여기에 있는가라는 탄식과 함께 그 여성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그는 무사히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말만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 군인처럼 자신이 겪은 일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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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M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
WAM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퀼트 작품.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한땀한땀 그때의 경험을 되새기며 고통으로 만들었을 작품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화려한 색감이 시선을 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화롭던 마을을 일본군이 어떻게 도륙하고 그들에게 안겨준 고통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알 수 있다. 1일에 1000명의 사람이 방문하는 야스쿠니와는 대조적으로 WAM의 1년 방문객은 약 3000여명 정도라고 한다.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곳이 역사왜곡의 산실보다 환대받지 못하는 현실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 일정의 마지막 날,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일본 국회를 찾았다. 이번엔 전후 유족 수집 관련 간담회 및 기자회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생성 노동사회 관료가 이희자 선생님 등 유족들의 요청서를 받고 답변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노력하겠다.’, ‘한국정부와 협의하겠다’, ‘러시아 정부에게 시베리아 수습 유골 중 조선인으로 보이는 유골 명부를 받았으나, 이는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인해 한국 유족들에게 전해줄 수 없다’는 등 예년과 다르지 않은 후생성의 답변에 이희자 선생님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셨다.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내 머리 속에서 절제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일본인 답지 않게, 일본인 기자 1명과 일본인 유족 1분의 반응이 매우 격렬했다는 것이다. 왜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느냐, DNA 데이터를 구축한다고 했는데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내 DNA를 주겠다는 등의 말을 하며 일본 정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출하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첫날과 달리, 일본을 떠나는 마지막 날, 일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번 유스포럼에 모인 청년들, 한일관계재설정 연대회의에 모인 시민운동가들, 양 국가의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목소리를 모은다면 거센 비바람과 어두운 구름이 물러가듯, 우리 한일간의 관계도 좀더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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