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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전쟁과 식민지배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역사교육을 반대한다.




일본 정부는 2022년도부터 학교 현장에서 사용할 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와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검정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번에 가장 주목할 교과서는 일국사를 넘은 인류보편사를 지향하는 역사교육을 표방하며 신설된 [역사총합]입니다. 일국사를 넘어선 세계사 속에 자국사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지향하고 있는 역사교육의 방향이므로 이번 교과서는 특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적지 않은 기대감마저 주었습니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은 그 형식이나 자료의 제시 등에서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목대목의 서술에서 필자들의 힘겨운 고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세계사와 자국사를 어떻게 융합적으로 기술해야하는가라는 중요한 고민을 던져주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일본의 필자들도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최근 세계 역사교육의 방향은 16세기 서세동점의 역사 이래 지구상 대다수 인류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도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반인종주의나 탈식민주의에 대한 다양한 흐름은 인류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방향의 전환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일 것입니다. [역사총합]의 기조 또한 그러한 인류사적인 반성에 기초해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검정결과는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 면에서 기대이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총합]은 20세기 서양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 기대어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범죄를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나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는 학습지도요령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 식민화의 출발이 된 러일전쟁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일본정부 스스로 공표한 근린제국조항에 어긋나는 서술로 한국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인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교과서가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을 다루는 항목에서 제목을 일본의 아시아 ‘진출’로 표기해, 식민지 침략과 그에 따른 식민지배의 부당성과 인권범죄에 대한 생각을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인식은 러일전쟁에 대한 편향된 인식과 함께 학생들에게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반성보다는 제국 일본의 위용만을 느끼게 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아시아 침략에 대한 표현은 이미 1982년에 심각하게 문제가 된 바 있고, 일본은 ‘근린제국조항’을 마련해 아시아의 분노를 무마하려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부 교과서는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책임을 묻는 도쿄 재판에서 일본에게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소수의견이 제출되었던 사실을 자세히 소개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도쿄재판이 부당했다고 느낄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의 전쟁 피해를 입은 아시아인들은 물론이고 2차세계대전 피해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 누구도 공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검정과정에서 이런 서술이 걸러지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한편, 상당수 교과서들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서술을 삭제하거나 축소하였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의 강제성을 다룬 교과서는 단 한 권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본문이 아닌 날개 부분에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는 1993년 고노 내각관방장관담화에서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인정한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한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과도, 국제사회를 향해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는 약속과도 배치됩니다.

또 2023년이면 100년을 맞는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문제 또한 가해주체도 희생자 숫자도 사라져 사건의 내용조차 알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밖에도 한국과 관련한 서술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의 한일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마치 사방이 살얼음판인 허허벌판을 걷고 있는 기분마저 듭니다. 그 어느 때보다 대화가 중요한 시점에 양국 당국자들은 마주 앉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동북아시아의 정치 정세도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각국에서는 애국주의가 강하게 힘을 얻고,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서로에게 불필요한 적대의식마저 드러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발표된 일본 고등학교 필수과목의 검정결과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하고 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합니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2001년부터 동북아시아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대립관계를, 공동의 역사인식을 통해 평화공생의 미래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일본과 중국의 연구자, 교사, 청소년들과 함께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를 한중일 공동부교재를 통해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하고, 청소년들 간의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관계자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우리는 일본정부에게 한국의 역사인식에 관한 목소리를 좀 더 귀담아 들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침략을 당한 입장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역사인식과, 침략을 한 입장에서 가져야 할 역사인식에 대해 함께 논의해 주기를 바랍니다. 한일 간에는 이미 2002년 만들어졌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를 다시 부활시켜 공동의 역사인식 창출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일본의 교과서 집필자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한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교육하기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공감을 표합니다. 제국과 식민지배, 침략과 저항, 인권 등의 문제는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공통의 과제입니다. 이번에 여러분이 기술한 내용 중에 우리가 지적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고민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원하지 않는 식민지배와 전쟁의 고통을 겪은 이들의 입장에서 역사서술을 다시 한번 검토하고 수정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나아가 이 같은 주제를 두고 한중일 연구자, 교사들과 함께 적극적인 대화를 하고 공동의 인식을 확인하고 확산해 나가는 노력에 동참해 주기를 호소합니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탈식민, 반전, 인권, 환경 등의 인류사적 보편가치를 지향하고, 평화공생의 아시아를 향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의 교과서 역사서술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역사서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좀 더 나은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역사대화를 지속해 나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침략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는 서술을 바로잡아, 평화공생의 아시아를 향한 지난 20여 년의 역사대화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2021.3.30.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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